포드 2000: 포드의 야심적인 세계화 계획

포드 2000의 출범경위

 

1993년 10월 15일 세계 제 2의 자동차회사 포드(Ford)의 북미사업본부와 유럽사업본부에서 근무하는 15명의 고위경영자들이 영국 런던에 모인다. 포드의 회장으로 갓 임명된 알렉스 트로트만(Alex Trotman)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이 회의가 열릴 당시 포드가 큰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2년을 연속해서 적자를 냈던 포드는 93년에 꽤 많은 이익을 올리고 있었으며, 유럽에서는 시장선도기업(market leader)이었다. 또 미국에서는 GM과의 간격을 꾸준히 좁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트로트만은 10년 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다. 그것은 포드가 강한 지역은 연성장률이 2% 밖에 안되는 성숙시장인데 반하여, 급성장하고 있는 아시아시장에서는 일본회사들의 세력이 매우 빨리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90년대 초 아시아 자동차시장의 규모는 서유럽시장의 절반정도인 680만대였는데, 이것이 2004년에는 미국시장보다 25%나 큰 1,900만대가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일본회사들의 강점 중의 하나는 그 전설적인 린 생산(lean production)이었다. 토요타의 노동자들은 1년에 평균 37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데, 포드의 노동자는 20대 밖에 못 만든다. 게다가 일본회사들은 세계화를 통한 규모의 경제를 더 많이 누리고 있었다. 예를 들어, 포드차 중에서 가장 잘 팔리는 토러스(Taurus)의 연판매량은 50만대인데, 토요타는 코롤라(Corolla)를 1년에 140만대나 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미국에 공장을 더 많이 짓고,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서도 생산시설을 늘릴 계획을 세우는 등 세계화를 향한 행군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그들의 생산원가가 더 떨어질 것임은 틀림없었다. 런던에 모인 포드의 경영자들은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일본회사들에 비해 그들의 회사는 훨씬 느리고 덜 세계화 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포드는 최신모델 콘투어/미스틱(Contour/Mystique)을 시장에 내놓기까지 60억 달러를 투자하였는데, 이것은 경쟁사들이 쓰는 돈의 무려 네 배나 되는 액수였다.  또 토러스를 개조하는데 5년이나 걸렸는데, 일본회사들은 2년 내에 새 모델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런던회의의 목적은 엔진, 변속기, 차축(axle) 등의 생산을 범세계적으로 통합·조정함으로써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는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 도중 트로트만은 통합·조정의 범위를 엔진이나 변속기에만 한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는 한층 더 급진적인 구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회의가 끝난 후 트로트만은 24명으로 이루어진 팀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좀더 획기적인 방안을 검토하게 한다.회사 안에서 아주 명망이 높은 행크 닉콜(Hank Nickol)이 이끄는 이 팀은 93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미시간주 디어본(Dearborn)에 있는 포드의 본사에서 그들의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그 에 포드의 이사회는 안건으로 올라온 과감한 세계화계획을 승인한다. 이렇게 해서 확정된 것이 다름 아닌 바로 ‘포드 2000’이다.

 

포드 2000의 시행

‘포드 2000’의 핵심은 당시 외형 230억 달러의 유럽사업본부와 1,050억 달러의 북미사업본부를 합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사업본부는 그 동안 별개의 경영구조·제품·공장을 갖고 있었고 또 경영방식도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것은 사실상 두 개의 거대기업을 합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 프로그램은 조직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 마련이었다.예를 들어, 1995년 1월 이후 2만 5천명의 관리자들이 새 보직을 받았거나 상관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포드 2000이 성공하려면 종업원들의 이해와 동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트로트만은 손수 나서서 종업원들에게 포드 2000의 당위성을 역설한다. 변화를 일으키는 데 있어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포드는 또한 성공적으로 조직에 변화를 가져온 토요타나 맥도날드같은 회사 뿐만 아니라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바 있는 GM같은 회사들의 사례도 미리 자세히 연구했다고 한다.1994년 10월 트로트만은 플로리다주 올란도(Orlando)에 있는 디즈니월드(Disney World)의 회의센타에서 그곳에 모인 2,000명의 고위간부들에게 연설한다. 이것은 그의 설득작업의 그야말로 정점이었다. “포드 2000은 단순히 조직도를 다시 그리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그 목표는 단지 원가를 내리고 효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차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연설이 끝난 후 그는 청중들로 하여금 호텔로비에 마련해 놓은 ‘약속의 벽’(wall of commitment)에다 각자의 이름을 써넣도록 했다. 즉 참석자 모두에게서 포드 2000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이 때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다짐을 하는 등 감정이 북받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전세계의 32만 포드종업원들은 비데오를 통해 트로트만의 이 연설을 모두 듣게 된다.그러면 포드 2000이 시행되면서 포드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성과 및 앞으로의 과제

포드의 북미사업본부와 유럽사업본부는 포드자동차사업본부(Ford Automotive Operations)로 통합되었으며, 그 사장에는 하겐록커(Hagenlocker)가 취임한다.그는 네 사람의 기능담당부사장으로부터 보고를 받는다. 네 사람의 부사장은 신제품개발, 판매 및 마케팅, 생산, 구매를 각각 맡고 있는데, 그들의 임무는 주로 각 분야에서의 가장 좋은 경영방식·기법을 전세계에 퍼져 있는 포드사업장에 도입하거나 퍼뜨리는 것이다.부사장들 중에서는 일본회사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새로운 모델을 빨리 그리고 싸게 개발해야 하는 잭 내써(Jac Nasser) 신제품개발담당 부사장의 책임이 가장 막중하다고 할 수 있다.포드는 포드 2000을 시작하면서 크게 두 가지의 목표를 세운다.하나는 일년에 약 30억 달러를 절약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신제품개발에 드는 시간을 현재의 37개월에서 2년 이하로 줄이는 것이다. 이 밖에 포드는 주문에서 배달까지의 시간(order-to-delivery cycle)을 15일 이하로 하고, 2005년까지는 차량플래트폼(vehicle platform)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되 거기에서 생산되는 모델의 수는 50% 늘리려고 한다.포드는 또 여러 부문의 전문가들(디자이너, 엔지니어, 마케팅, 생산 등)로 제품개발팀을 구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함께 신제품을 개발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만들 수 없거나 팔리지 않는 차를 설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포드는 포드 2000을 시행하기 시작한 이후 95년에 이익이 22%나 떨어지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트로트만과 잭 내써의 강력한 지도력과 정성으로 이 프로그램은 큰 효과를 내고 있다.  즉 포드는 ‘포드 2000’ 덕분에 매년 약 30억 달러를 절약하고 있으며, 그 결과 95년 이후 이익이 꾸준히 늘고 있다. 또 97년에는 GM보다 이익을 더 많이 올렸으며, 미국에서도 GM과의 시장점유율의 차이를 차차 좁혀가고 있다.

1998년 트로트만 회장이 은퇴하고 포드 2000을 성공적으로 추진해 온 잭 내써가 회장으로 취임한다. 과감한 의사결정과 추진력으로 이름난 내써이지만 그에게 떨어진 과제는 결코 만만치 않다.  특히 세계의 자동차 생산능력이 수요를 25∼30% 정도 웃도는 상황에서 포드가 앞으로 어떻게 만족할만한 수익성을 유지하느냐는 그가 꼭 풀어야 할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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